제1차 중동전은 1948년 5월 15일부터 1949월 2월 24일까지 계속되었고 이 결과로 이스라엘이 건국했다. 전쟁은 잘 준비되고 단결된 국가가 전쟁에 승리한다는 교훈을 알려주었다.​​​​​


[정기종 전 카타르 대사] 1948년 5월 15일 발발한 제1차 중동전은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벌어진 대규모 국제전이다.

이스라엘과 아랍 간의 전쟁으로 1949월 2월 24일까지 계속되었다. 이 결과로 이스라엘이 건국했다. 전쟁은 잘 준비되고 단결된 국가가 전쟁에 승리한다는 교훈을 알려주었다.

이스라엘은 근 2000 년 만의 디아스포라를 끝내고 민족국가를 재건했다. 이것은 유대민족의 강한 민족의식의 발로였고 미국과 영국의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미국은 이스라엘을 중동에서의 최우방국으로 보고 레버리지로 활용하려고 했다. 여기에는 양국 간의 유대기독교적 (Judea-Christianity)인 공감대 또한 크게 작용했다.

1948년 5월 14일 영국군이 팔레스타인에서 철수하자 텔아비브의 유대인 국가위원회는 즉시 이스라엘 국가 창설을 선포했다. 그리고 수 시간 만에 트루먼 미국대통령은 이스라엘을 국가로 승인했다.

그러자, 다음날 이집트의 공군기가 텔아비브를 폭격했고 정오를 기해 아랍 7개국의 병력 3만5000명이 공격을 개시해 아랍과 이스라엘 간의 전면전이 되었다.

이스라엘의 전투 병력은 약 2만명이었지만 총동원 후에 병력은 약 7만5000명이 되었고 해외 거주 유대인들의 자원해 입대했다.

1936년 8월 스위스 제네바에서 창설되어 미국 뉴욕에 본부를 둔 세계유대인의회(World Jewish Congress)와 같은 유대인기구들이 자금과 지원병 모집으로 후원했다.

공격측인 아랍연합군은 이집트 군이 강력한 편이었으나 부정부패와 같은 군내부의 문제점이 많았고 요르단군은 주요 보직에 있는 40여명의 영국군 장교들이 비효율적인 전술 지휘를 했다.

장교와 사병 간의 부조화와 기율문란으로 이집트군은 거의 전과를 올리지 못했고 시리아와 레바논으로부터의 의용병들은 실전 경험이 없었다. 전쟁터가 된 고향을 지키기 위해 팔레스타인 민병대만이 필사적으로 전투에 임했다.

이에 반해 이스라엘의 군대는 일치단결된 부대였다. 군의 중추는 하가나(Haganah)군이었고 두 개의 부대로 편제되었다.

하나는 팔마(Palmah)부대로 대부분이 소련으로부터 돌아온 사회주의당원들로 구성되었고 제2차 세계대전의 참전경험으로 다져진 정예부대였다.

또 하나는 히쉬 (Hish) 정규야전군이었다. 그리고 독립이전에 영국을 대상으로 테러 활동을 했던 조직들은 전쟁에서 유격대와 같은 활동을 했다.

장년층은 향토예비군 역할을 했고 병참과 보급과 같은 비전투부분은 여성들이 담당해 최전선에서의 전투력을 높였다. 이스라엘은 사실상 국민 전체가 참여한 총력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