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하일기.정조 4년(1780) 연암 박지원이 건륭제의 70세 생일을 축하하는 사절로 청나라에 다녀온 일을 적은 여행기. [사진=나무위키]


[정기종 전 카타르 대사]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熱河日記)'는 조선의 실학자가 보는 새로운 관점을 전해준다. 실사구시의 실용적 정신을 알기 쉽게 비유나 사례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연암은 조선과 주변 민족과의 관계도 현실적으로 평가했다. 당시 한반도 주변의 정세를 보면서 몽고(蒙古)와 아라사(俄羅斯) 종족의 강맹(强猛)함을 주의해야 한다고 했다.

열하일기를 쓴 1780년을 즈음해 러시아의 시베리아 진출이 완성되었고 1860년 청나라는 베이징 조약으로 연해주를 상실했다.

박지원은 조선의 발전을 위해서 청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여 이용후생을 성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열하일기 중에 '일신수필(馹汛隨筆)'에서 ”천하를 위해 일하는 사람은 진실로 백성에게 이롭고 국가에 도움이 된다면 비록 그 법이 오랑캐에서 나온 것이라 할지라도 이를 취하여 본받아야 할 것“이라고 했다. 양반이라는 명분보다 실리를 중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넓이가 수천 리나 되는 나라에서 백성들의 살림살이가 이토록 가난한 까닭은 무엇인가, 한마디로 말하면 국내에 수레가 다니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하여 수레를 활발하게 이용할 것을 건의했다.

뿐만 아니라 ”조선은 배가 외국으로 통하지 않고 수레가 국내에 다니지 못하므로 모든 물건이 제바닥에서 나서 제바닥에서 소모된다“고 평가하면서 교통기관의 발전과 통상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이러한 통상 목적은 단순히 물품의 교역에 한정되지 않고 대외정보의 취득에 뒤떨어져 우물 안 개구리가 되지 않기 위해서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박지원은 열하일기의 문체가 순전하고 바르지 못하며 내용에 불순한 것이 있다는 이유를 붙인 조정에서 호된 비판을 받았고 정조의 문체반정(文體反正) 지적을 받기도 했다.

한편, 열하일기는 '수필'이 일본인이 만든 단어가 아니었음을 알려준다. 마찬가지로 시사잡지 중에는 '공론(公論)'이라는 이름을 붙인 책자들이 있다. 공론이라는 말이 현대적 느낌을 주어서인지 일본이 만든 단어처럼 알려졌다.

그러나 우리 고전이나 중국 고전 중에는 현대식 용어처럼 보이는 한자도 많다.

열국지(列國志)에는 주나라와 정나라의 역사를 평가하면서 '수지공론 난용역 (誰知公論 難容逆)'...“그 누가 공론은 반역을 용납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았는가)라고 공론을 설명했다. 약 2800년 전 춘추전국 시대에도 여론의 영향력은 중요했다는 것을 알려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