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1945년 8월 15일은 나라를 되찾은 광복절이다. 일본은 종전일로 부르는 패전일이다.


[정기종 전 카타르 대사] 인접한 우방국가로서 한국과 일본의 8월은 서로 상반되는 역사인식을 갖는 달이다.

우리의 1945년 8월 15일은 나라를 되찾은 광복절이며 일본은 종전일로 부르는 패전일이다. 1910년 8월 22일은 '한국병합에 관한 조약' 체결일로 그 결과로 이루어진 대한제국의 소멸에 대한 역사인식 역시 동일하지 않다.

근대 제국주의 시대 일본의 한국병합은 주도면밀하게 단계적으로 진행되었다.

우선 한국 내의 여론과 친일 지식인층에 유화적으로 접근하면서 병합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그리고 1904년 2월 '한일의정서'와 8월 '제1차 한일협약'으로 기초를 다졌다.

러일전쟁의 발발로 급변한 동북아 정세는 여기에 추동력으로 작용했다. 1905년 6월에는 경찰사무를 일본에 위탁하는 협정을 체결했고 경무총감부가 설치되어 대한제국의 경찰권도 모두 제거되었다.

11월에는 '제2차 한일협약(을사조약)'으로 국가주권을 단계적으로 접수해 나갔다.

그리고 1910년 8월 22일 '한국병합에 관한 조약'이 일본군의 감시하에 강압적으로 체결되었다.

병합 직전인 7월에는 아카시모토지로(明石元二郎)가 조선주재 초대 헌병사령관겸 정무 총장으로 부임해 독립운동 탄압과 만주조선(滿鮮) 공작활동에 전념했다.

아카시는 전직 독일주재 일본대사관 무관으로 근무 당시 대(對)러시아 모략 분열공작으로 러일전쟁의 승리를 막후에서 지원한 인물이다.

러일전쟁 중에 아카시 한 사람이 사용한 비밀공작금은 당시 일본정부의 1년 예산 2억 3천만엥중 에 약 100만엥에 달하는 거금이었다.

일본의 식민통치가 한국의 근대화에 기여했는지의 물음은 단지 물질적인 인프라 건설만을 기준으로 평가할 수는 없다. 근대화는 물질이 아니라 정신적 개화가 기본이며 목표와 방향성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민족 스스로가 근대화의 주인공이라는 주인의식이 필수적이다. 학교와 병원, 공장과 도로와 같은 기간 시설을 만들어 운영해도 이민족의 지배 아래에서는 민족의 미래가 없는 것이다.

일제 강점기를 한국과 일본이 동등한 관계의 한 나라였다는 오해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일본도를 찬 순사가 감시하고 일본인 선생이 한국인 학생들의 언어를 지배하고 왜곡된 역사를 만들어 주입시키는 것은 근대화가 아닌 일본화와 다름없다.

일제는 한국의 자주적 근대화 과정을 훼손했기 때문에 비판받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자력갱생 과정을 중도에 침탈했다고 볼 수도 있다.

한국의 근대화는 오직 일본에 의해서만 가능 했다는 단정이나 한국인 자신으로는 전혀 불가능했다는 인식은 제국주의의 오만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