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에서는 회의 못지않게 오찬(Luncheon) 이나 만찬(Dinner)이 중요하다.[사진=정기종]
[정기종 전 카타르 대사] 외교행사를 분위기를 기준으로 나눈다면 회의와 정찬(Banquet)으로 구별해 볼 수도 있다.
장소에 따라서 딱딱하거나 부드럽게 분위기가 바뀌는 것이다. 회의에서는 실질적인 내용이 토의된다. 문안 교섭이 진행되고 회의 후에는 결과물이 생산된다. 당연하지만 분위기는 정숙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식사가 나오는 정찬의 분위기는 다르다. 좌석에는 맛있는 음식과 달콤한 디저트가 은제 식기와 크리스탈 잔에 담겨 대접된다. 포도주와 부드러운 음악이 나오고 남성은 정장을 입고 여성은 우아한 드레스와 장신구를 착용한다.
회의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오찬(Luncheon) 또는 만찬(Dinner)이다.
외교가에서는 말하는 대로 외교는 공관이 아니라 대사관저에서의 오·만찬에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소수의 인원이 모여 분위기가 부드럽기 때문에 우호적이며 내밀하고 솔직한 대화가 가능하다.
회의와 정찬 모두가 외교적 목적을 놓고 진행되는 공적 행사다. 회의에서는 문서 내용이 꼼꼼하게 다뤄지지만 정찬의 경우에는 식사와 주류를 먹고 마시면서 대화를 나누게 된다.
웃으며 나누는 대화지만 그중에 진담과 농담 그리고 의중을 타진하고 견제하는 예리함이 있다.
따라서 감미로운 포도주와 멋진 요리를 제대로 음미하기는 힘들다. 맛을 즐기는 자리가 아니고 책임을 다해야 하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언중유골이라고 할 대화도 등장하고 때로는 설전이 벌어지기도 한다.
동서 냉전이 고조되었던 1955년 2월 이든 영국 외무장관은 방콕에서의 동남아시아조약기구(SEATO) 회의 참석을 마치고 이집트를 방문했다.
그리고 나세르 대통령과 회담하고 바그다드 조약에 참여를 권유했다. 카이로의 나일 강변에 있는 영국 대사관저 만찬에서 나세르는 이곳이 과거에 “이집트가 통치받았던 (Egypt used to be governed)” 장소라고 말했다.
그러자 이든은 “통치했다기보다는 아마도 조언을 했을 것(Not governed, perhaps, advised, rather.)”이라고 응수했다.
나세르가 고집스럽게 영국에의 협력을 거부하자 이든은 아랍의 속담 하나를꺼냈다.
“엘리사닉 후세닉(El-lisanek husanek; Your tongue is like your horse)”이라는 것으로 혀는 말과 같이 통제하지 않으면 광폭하게 되니 조심하라는 나세르에 대한 경고였다.
이후 이집트는 1955년 10월 시리아와 사우디아라비아와 연이어 군사협력조약을 체결했다. 그리고 바그다드 조약의 주축인 이라크의 쿠데타를 유도하면서 영국이 주도하는 바그다드 조약을 붕괴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