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종 전 카타르 대사] 남북분단으로 인해 사실상 섬이 된 한국은 오대양을 망라하는 해양 개척의 역량을 키우고 있다.
기후변화로 북극항로의 활성화가 임박한 21세기에는 더욱 중요한 국력요소다. 우리 역사에 남아있는 해양력을 보면 이러한 자신감을 더해준다.
기원 전후의 시기 한반도의 대외교류는 북방대륙을 통해서만 아니라 주변 바닷길을 통해서도 활발히 이루어졌다.
관련 학자들의 해양교류 연구결과는 고무적인 사실을 알려 준다. 남방교류의 역사는 '삼국유사'가 전하는 가야의 수로부인 허황옥의 도래기록이 대표적이다.
고고학에서는 신라유물 중에 이국적인 양식의 청색 유리구슬의 기원을 인도네시아에서 찾았다.
당시 해양로는 신라와 중국 광저우 그리고 베트남 옥에오 항구를 연결했다고 본다. 경주 대릉원의 신라고분 토우 중에는 물소, 원숭이, 개미핥기와 같이 한반도에 자생하지 않는 남방계 동물형상이 있다. 이 중에는 물 위에 짓는 고상가옥 모습의 토우도 있다.
7, 8세기 신라인들이 동남아시아와 인도로 항해한 역사기록이 있고 신라 승려들은 인도로 가서 불교를 공부했다.
당나라 수도 장안과 인도를 연결하는 바닷길을 이용했다. 도중에 실리불서국 서쪽에 있는 파로사국을 거쳤고 항해 중에 태풍이나 질병으로 사망한 여행자들도 많았다.
실리불서국은 수마트라섬 중부 팔렘방 지역 인도네시아 고대 해상왕국 스리위자야로 보이고 파로사국은 수마트라섬 서북부 바루스의 고대왕국으로 추정한다.
미국의 동양고미술학자 코벨은 한국과 일본에 수십 년 거주하면서 양국 고대사를 연구했다.
그리고 신라 승려들의 서역여행 연구를 통해 한민족의 용기와 역동성을 확인했다. 9세기 통일신라의 선단은 황해를 무대로 중국과 한반도 그리고 일본 간의 해상권을 장악했고 삼국사기에는 장보고의 청해진 기록으로 남아있다.
일본인 승려 엔닌은 838년에서 847년에 걸쳐 중국 일대를 여행하고 '입당구법순례행기'를 저술해 남겼다.
코벨이 소개한 엔닌의 일기에 나오는 신라인들은 육지뿐만 아니라 바다에서 더욱 막강한 사람들이었다.
엔닌이 중국에서 10여 년 동안 본 선박은 거의 모두 신라인 소유였다고 한다. 일본 배도 있으나 느리고 침수 위험이 있어서 신라의 쾌속선에 비교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또 일본 배는 신라인 선원들의 도움 없이는 항해에 나서지 못했다고 이들의 항해력에 감탄하고 감사했다. 현재 세계정상급에 있는 한국의 조선술과 해양선단을 보면 이같은 역사적 맥락을 이해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