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종칼럼] 탈레랑의 포도주 연회 외교


[정기종 전 카타르 대사] 탈레랑은 나폴레옹 정부에서 외무장관이었다. 가톨릭 교육을 받은 신부로부터 외교관으로 전직한 독특한 이력을 가진 인물이다.

그리고 나폴레옹 전쟁 후 유럽의 전후처리를 위해 1814년 9월부터 1815년 6월까지 개최된 빈 회의 (Congress of Vienna)에서 패전국 프랑스의 영토분할 위기를 모면하는 중요한 역할을 해 프랑스 외교관의 사표가 되었다.

나폴레옹은 '집중의 원칙'에 입각해 연이은 전쟁에 승리했다. 전체병력의 수는 열세여도 결정적인 시간과 지점에 적보다 상대적으로 우세한 병력을 집중시켜 이긴다는 전술이다.

당시 유럽 대포의 사정거리는 약 1.6km였고 화력을 집중시키기 위해서는 빠른 이동이 요구되었다. 프랑스군은 대포의 이동 장비를 개선하고 포의 무게를 줄이고 구경을 표준화하면서 화력집중 전술을 발전시켰다.

보병의 행군도 1분당 120보로 높여 여타 유럽군대의 분당 70보를 추월해 이동 속도를 높였다. 1804년 12월 나폴레옹이 프랑스 황제에 즉위 후 10년간의 전성기가 패전으로 끝나고 1814년 5월 엘바섬으로 유배된다.

그리고 승전국인 오스트리아와 영국 그리고 러시아와 프로이센 4대 강국은 유럽의 영토 재편을 위한 회의를 개최했다.

9월부터 오스트리아 빈의 쉔브룬 궁전에서 열린 회의에는 90개 왕국과 53개 공국을 비롯해 대부분 유럽국가가 참가했다.

그러나 전후 새로운 국경을 정하기 위한 논의는 계속 지연되었다. 열강들의 알력과 패전국이지만 프랑스 탈레랑의 외교가 성공한 때문이기도 했다.

회의 주최국인 오스트리아의 메테르니히 총리는 회의 분위기를 우호적으로 만들기 위해 빈번히 연회를 개최했다. 왈츠로 유명한 도시답게 무도회도 자주 열렸고 “회의는 춤춘다. 그러나 회의는 진전되지 않는다”라는 말이 나왔다.

프랑스에서는 포도주가 대량으로 보내졌고 이것 역시 탈레랑의 외교전술의 하나였다고 볼 수 있다.

회의 분위기를 이완시켜 틈을 만들어 프랑스의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의도였다. 결국, 회의는 1815 년 2월 엘바섬을 탈출한 나폴레옹이 워털루에서의 재기전에서 패해 프랑스군이 완전히 와해된 후에 회의 진행에 박차를 가하게 된다.

6월 9일 빈 회의가 마침내 종료되었다. 탈레랑은 외교전략의 명언을 여럿 남겼다.

그중에 외교관이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은 “자신의 언변에 스스로 도취하는 것”이라는 말도 있다. 자아도취는 균형 감각을 잃고 부정확한 언행을 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빈 회의에서도 프랑스는 승리에 도취한 강대국들의 방심과 세력균형 정책을 이용해 국익을 지킬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