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종 전 카타르 대사] 해외에서 근무하는 젊은 부부들이 가장 곤란을 당하는 것은 행사가 있어 외출해야 할 때 아이들을 맡기는 일이다.
허물없이 지내는 이웃이 있으면 부탁하기도 하지만 이런 일이 자주 있다 보면 부탁하는 쪽이나 부탁받는 쪽 모두에게 부담이 된다.
그 때문에 집에 와서 아이를 봐주는 아기 돌보미를 구하게 된다. 서너 살 정도 어린아이를 맡아 봐주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울면 달래고 대소변을 치워주고 잘해주다가도 행여 다치기라도 하면 책임을 질 수도 있고 미안하기만 한 것이다. 애 봐준 공은 없다는 말도 있다.
화이자는 해외 근무 당시에 아이들을 보아주던 현지인 아줌마였다. 푸근한 성격에 아이도 잘 보고 식품이나 옷 등을 주인 몰래 가져가지 않는 착한 아줌마였다.
50대 중반의 두툼한 체구에 어울리게 마음씨 좋은 그녀는 마치 자신의 아이들을 돌보는 것처럼 연년생 어린 남매를 잘 돌봐주었다.
성실한 사람이었고 보수를 받기 때문에 직업으로만 일하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아이를 좋아하기 때문에 일하는 모습이었다.
다른 것은 배워서 할 수 있지만 아이 사랑은 본능적인 것으로 배워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닐 것이다. 더구나 한참 손이 많이 가는 어린아이들을 돌보아주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다.
외국에서 생활하는 사람은 거의가 현지인이나 제3국인을 고용하게 된다. 사적으로는 집안일을 돕는 가정부나 아기 돌보미를 쓰거나 사무실에서는 업무를 보조해주는 직원으로 활용한다.
공적인 업무에서도 마찬가지지만 집안일을 시키다 보면 고용주로서의 자세가 나오게 된다.
우리나라의 경제력이 높아진 현재에는 은연중에 가난한 현지인을 낮춰보는 시각을 갖게 될 수도 있다. 더구나 몰래 집에서 음식이나 옷가지를 훔쳐 간다면 분노가 폭발할 수도 있다.
대영제국 시절 영국인이 보여주었던 인도인이나 이집트인에 대한 고자세와 멸시적 태도는 많이 알려져 있다.
이와는 다르지만 일본제국의 총독 치하의 역사적 경험이 보상 심리로 나타나 우리보다 경제력이 뒤처지고 사회환경이 열악한 현지인들에게 투사되는 성향을 보일 가능성도 있다.
그렇지만 동병상련이라 할 수 있는 우리나라와 비슷한 역사의 상처를 안고 있는 이들에 대해서는 아량과 포용력이 필요하다.
우리나라에도 1960년대와 1970년대에는 식모 또는 가정부라고 불리는 가사도우미가 있었다. 시골에서 도시로 와서 자리 잡은 하나의 직업군이었고 이들은 누군가의 누이였고 어머니였다. 인품이 좋았던 화이자 아줌마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