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노벨평화상 수상자는?···김대중 전 대통령 한국인 첫 ‘수상’

개인 110명, 단체 30곳···탈레반 피격소녀 17세 최연소 수상
마하트마 간디, 톨스토이는 수 차례 후보에도 수상 못해

정영선 승인 2023.10.07 07:04 의견 0
노벨평화상은 1901년 국제적십자위원회 설립자인 스위스의 장 앙리 뒤낭과 국제평화연맹 설립자인 프랑스의 프레데리크 파시의 공동 수상을 시작으로 2022년까지 총 103차례 수여돼 개인 110명, 단체 30곳의 수상자를 배출했다.2022년 수상자인 벨라루스 인권운동가 알레스 비알리아츠키와 러시아 국제인권단체 ‘메모리얼’, 우크라이나 인권단체 ‘시민자유센터’.[사진=노벨평화상 트위터 캡처]


[나눔경제뉴스=정영선 기자] "인류에게 가장 큰 공헌을 한 사람에게 수여한다"는 알프레드 노벨의 유언을 바탕으로 제정된 노벨상 중에서도 ‘노벨평화상’은 가장 관심이 큰 상이다.

노벨평화상은 1901년 국제적십자위원회 설립자인 스위스의 장 앙리 뒤낭과 국제평화연맹 설립자인 프랑스의 프레데리크 파시의 공동 수상을 시작으로 2022년까지 총 103차례 수여돼 개인 110명, 단체 30곳의 수상자를 배출했다.

올해 노벨평화상은 이란의 여성 억압에 맞서 싸운 인권운동가 나르게스 모하마디에게 돌아갔듯이, 역대 수상자들은 인권 운동에 맞서 싸운 이들에게 돌아간 경우가 많았다.

지난해 노벨평화상은 러시아와 벨라루스의 권위주의 체제에 저항하며 인권을 위해 투쟁해온 개인 1명과 단체 2곳이 수상했다. 벨라루스 인권운동가 알레스 비알리아츠키와 러시아 국제인권단체 ‘메모리얼’, 우크라이나 인권단체 ‘시민자유센터’가 주인공들이다.

알레스 비알리아츠키는 벨라루스가 옛소련 해체로 독립하기 직전인 1980년대 중반부터 벨라루스의 인권 신장을 위해 온 몸을 받쳤던 인물이다.

‘메모리얼’은 1989년 창설 이후 러시아를 대표하는 가장 오래된 인권단체 중 하나다. 구 소련과 개방 후 러시아의 정치적 탄압을 연구·기록하고, 인권 상황 감시 활동을 해 왔다.

시민자유 센터는 구소련에서 독립한 국가들의 인권단체 지원에 중심 역할을 했다. 최근에는 우크라이나 내부 러시아 전쟁범죄를 발견하고 기록하는 활동에 주력했다.

역대 노벨평화상 최연소(17세) 수상자​​​​​​​인 파키스탄 말랄라 유사프자이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노벨평화상의 역사가 한 세기를 훌쩍 넘기면서 다양한 기록도 쏟아지고 있다.

역대 노벨평화상 최연소 수상자는 당시 17살이었던 ‘탈레반 피격소녀’ 말랄라 유사프자이다. 1997년 파키스탄에서 태어난 유사프자이는 11살 때부터 파키스탄 탈레반에 맞서 여성 교육권을 주장하다 2012년 10월 하굣길에 머리, 목, 어깨에 총격을 받고 치명상을 입었다.

이후 영국 버밍엄에서 치료를 받고 기적적으로 회복해 여성과 어린이 교육권을 위해 계속 활동했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17살이었던 2014년 역대 최연소로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2017년 영국 옥스퍼드대로 진학해 정치학, 철학, 경제학을 공부했다.

역대 수상자 중 최고령자는 1995년에 상을 받을 당시 87세였던 영국의 핵과학자 조지프 로트블랫이다.

반핵 운동에 앞장선 공로로 상을 수상했다. 외신들은 조지프 로트블랫 박사를 “핵무기를 제거하고 궁극적으로 전쟁을 종식하기 위한 운동에 우뚝 선 존재”라고 평했다.

최다 수상자는 1917년, 1944년, 1963년 등 3차례 평화상을 받은 구호단체인 국제적십자위원회(ICRC)다. ICRC의 설립자인 앙리 뒤낭은 1901년 평화상 초대 수상자이기도 하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한반도 및 아시아 민주주의와 인권의 신장, 햇볕정책을 통한 남북한의 화해와 협력 관계의 발전, 세계 평화에 헌신한 공로로 2000년 12월 10일 한국인 최초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유일한 한국인 수상자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한반도 및 아시아 민주주의와 인권의 신장, 햇볕정책을 통한 남북한의 화해와 협력 관계의 발전, 세계 평화에 헌신한 공로로 2000년 12월 10일 한국인 최초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노벨평화상을 거부한 사례도 있었다. 북베트남 대표였던 레둑토는 1973년 헨리 키신저 당시 미국 국가안보보좌관과 함께 베트남전 휴전조약인 파리평화협정을 이끈 공로로 공동 수상이 결정됐지만, 조국에 진정한 평화가 찾아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유일하게 수상을 거부했다.

마하트마 간디는 수 차례 후보에 올랐지만 결국 수상하지 못했다.

노벨평화상 후보로 올랐다가 수상하지 못한 인물들도 있다. 마하트마 간디, 톨스토이 등이다. 간디는 수 차례 후보에 올랐지만 결국 수상하지 못했다.

2006년 당시 노벨 평화상 수상자를 선정하는 노벨위원회 위원장 게이르 룬데스타드는 간디의 업적에 대한 인지가 부족했던 것은 노벨상 역대 최악의 누락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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